제주 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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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주 부씨는 제주 양씨, 제주 고씨와 함께 탐라의 국성을 이루는 성씨로, 탐라 개국 신화에 등장하는 부을나를 시조로 한다. 고려사 지리지와 고기에 따르면, 한라산 북쪽 삼성혈에서 고을나, 양을나와 함께 솟아났으며, 일본에서 온 세 공주와 결혼하여 농업을 시작하고 자손을 번성시켰다. 조선 시대에는 부언경을 일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으며, 부삼로의 자손 대에서 제주 6파로 분파되었다. 주요 인물로는 부종인이 있으며, 2015년 대한민국 인구 조사에서 10,222명으로 조사되었다. 제주특별자치도 북제주군, 남제주군, 서귀포시 등에 집성촌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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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부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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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종류 | 씨족 |
국가 | 조선 |
영지 | 제주특별자치도 |
가조 | 부을나 |
저명한 인물 | 부완혁 부좌현 승관 |
각주 | 제주부씨대종회 |
성씨 정보 | |
성씨 | 제주 부씨 |
한자 표기 | 濟州夫氏 |
나라 | 한국 |
관향 | 제주특별자치도 |
시조 | 부을나 |
중시조 | 부언경(夫彦景) |
년도 | 2015년 |
인구 | 10,222명 |
2. 기원
제주 부씨는 제주 양씨, 제주 고씨와 함께 탐라의 국성으로, 같은 유래를 가지고 있다.
부을나 이후의 상계는 전해지지 않아, 조선 초에 진용교위(進勇校尉) 후령별장(後領別將)을 지낸 '''부언경'''(夫彦景)을 1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제주 부씨는 제주 양씨, 제주 고씨와 함께 탐라의 국성으로, 같은 유래를 가지고 있다.
부을나 이후의 상계가 실전되어, 조선 초에 진용교위(進勇校尉) 후령별장(後領別將)을 지낸 '''부언경'''(夫彦景)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탐라 개국설화에 의하면 시조 '''부을나'''(夫乙那)는 탐라(耽羅) 한라산(漢拏山) 북쪽 모흥혈(毛興穴)에 솟아나온 세 신인(神人) 중 한 명이다.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은 수렵을 하여 살았는데, 하루는 바다에 이상한 상자가 떠내려와 건져 보니 세 미녀와 오곡의 종자,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세 신인은 세 미녀와 각각 결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니 그로부터 탐라는 개척되었다. 후에 벽랑국(碧浪國)으로부터 오곡(五穀)의 종자(種子)와 6축(六畜)을 가져온 세 공주를 아내로 삼고 활을 쏘아 화살이 닿는 곳을 일도(一徒), 이도(二徒), 삼도(三徒)라 부르고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高麗史古記|고려사고기중국어에 따르면, 탐라는 남해 가운데 있고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세 신인이 땅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맏이를 '양을나', 버금을 '고을나', 셋째를 '부을나'라 하였으며, 이들은 거친 들판을 돌아다니며 사냥하여 가죽 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어느 날 붉은 진흙으로 봉한 나무 상자가 동쪽 바닷가로 떠내려 온 것을 발견하고 나가서 열어보니, 그 안에 또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에 자줏빛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한 사람 따라와 있었다고 한다.
석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3인(人) 및 '망아지 송아지와 오곡 씨앗'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이에 사자(使者)는 자신이 벽랑국 사신이며, 벽랑국 왕이 "서해 한가운데 있는 산에 신자(神子) 3人이 강생(降生)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려는데 배필이 없다."라고 하며 세 왕녀를 모시게 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3인에게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大業)을 이룩'할 것을 권하고 홀연히 구름을 타고 떠나가 버렸다고 한다. 3人은 나이 차례로 나누어 배필을 삼고 '샘물이 달며 땅이 기름진 곳'에 나아가서 활을 쏘아 터를 정했다. 양을나(良乙那)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徒)로, 고을나(高乙那)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徒)로, 부을나(夫乙那)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徒)라 하고,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고 또한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로 부유하고 번영하였다고 한다.
東國通鑑|동국통감중국어은 성종 15년(1484) 간행되어 장왈양(長曰良)이라 하고, 장위양설(長爲良說)이 굳어졌으며, 이후에도 효종 4년(1654)에 이원진(李元鎭)목사(牧使)도 삼성혈조(三姓穴條)에 양고부(良高夫)라 썼으며, 숙종 29년(1703)에 이형상목사(李衡祥牧使) 역시 삼성사상량문(三姓祠上樑門)에 양고부(良高夫)로 썼다. 이때, 사우(祠宇)를 완성하고 삼신인(三神人)의 위패(位牌) 순위를 정함에 있어 삼성신인강생(三姓神人降生)의 사적 문헌과 국사를 널리 상고(詳考)한 끝에 양을나(良乙那)를 제1위에 모시고, 고을나(高乙那)를 제2위에, 부을나(夫乙那)를 제3위로 결정 후, '제문(祭文)을 지어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王朝實錄(왕조실록 42~P.163)에 의하면 영조 5년(1771)에 고한준(高漢俊) 등이 주상(主上)께 주청(奏請)하는 상소문에도 양고부(良高夫)로 썼다. 또한 이병도(李丙燾)著의 한국사(韓國史)에도 양고부(良高夫)요, 김태능(金泰能)著의 제주도사논고(濟州島史論攷)에도 양고부(良高夫)라 했으며 국사대사전•한국사대사전 등에도 양고부(良高夫)라고 기록하였으며, 현용준(玄容駿)著 「제주도신기(濟州島神記)」에도 양고부(良高夫)라 수록이 되어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 인용된 『고기』에 따르면, 태고 시대에 제주도의 한라산 북쪽 기슭의 삼성혈에서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삼신인이 솟아났다.[2] 삼신인은 사냥을 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제주도 동해안에 일본에서 떠내려온 나무 상자가 표착했다. 나무 상자에는 세 명의 일본 국왕의 딸, 소, 마, 오곡의 종자가 들어 있었다.[2]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 삼신인은 각각 일본 국왕의 딸을 배우자로 삼아 농업을 경영하고 가축을 길러 자손이 번성했다. 그 후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 삼신인의 15세 손자 셋이 신라에 조공하여, "성주", "성자", "도내"라는 칭호를 받았다.[2] 이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삼신인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이들이 바로 제주고씨, 제주양씨, 제주 부씨 사람들이다.
3. 시조
『고려사』 지리지에 인용된 『고기』에 따르면, 태고 시대에 제주도의 한라산 북쪽 기슭 삼성혈에서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삼신인이 솟아났다.[2] 삼신인은 사냥을 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제주도 동해안에 일본에서 떠내려온 나무 상자가 표착했다. 나무 상자에는 세 명의 일본 국왕의 딸, 소, 마, 오곡의 종자가 들어 있었다.[2]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 삼신인은 각각 일본 국왕의 딸을 배우자로 삼아 농업을 경영하고 가축을 길러 자손이 번성했다. 그 후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 삼신인의 15세 손자 셋이 신라에 조공하여 "성주", "성자", "도내"라는 칭호를 받았다.[2] 제주고씨, 제주양씨, 제주 부씨는 이 삼신인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4. 본관
탐라 개국설화에 의하면 시조 '''부을나'''(夫乙那)는 탐라(耽羅) 한라산(漢拏山) 북쪽 모흥혈(毛興穴)에 솟아나온 세 신인(神人) 중 한 명이다.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은 수렵을 하여 살았는데, 하루는 바다에 이상한 상자가 떠내려와 건져 보니 세 미녀와 오곡의 종자,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세 신인은 세 미녀와 각각 결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니 그로부터 탐라는 개척되었다. 후에 벽랑국(碧浪國)으로부터 오곡(五穀)의 종자(種子)와 6축(六畜)을 가져온 세 공주를 아내로 삼고 활을 쏘아 화살이 닿는 곳을 일도(一徒), 이도(二徒), 삼도(三徒)라 부르고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였다고 한다.[1]
고려사고기(高麗史古記)에는 탐라가 남해 가운데 있으며,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삼신인이 땅에서 솟아나니 맏이를 '양을나', 버금을 '고을나', 셋째를 '부을나'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인(三人)은 거친 들판을 돌아다니며 사냥하여 가죽 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붉은 진흙으로 봉한 나무 상자가 동쪽 바닷가로 떠내려 온 것을 발견하고, 나가서 열어 보니 그 안에 또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에 자줏빛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한 사람 따라와 있었다.[1]
석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3인(人) 및 '망아지 송아지와 오곡 씨앗'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사자(使者)는 자신이 벽랑국 사신이며, 벽랑국 왕이 "서해 한가운데 있는 산에 신자(神子) 3人이 강생(降生)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려는데 배필이 없다." 하여 3왕녀를 모시게 하였다고 말하며, '배필로 삼아 대업(大業)을 이룩'할 것을 청하고 홀연히 구름을 타고 떠나가 버렸다. 3人은 나이 차례로 나누어 배필을 삼고 '샘물이 달며 땅이 기름진 곳'에 나아가서 활을 쏘아 터를 정하니, 양을나(良乙那)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徒)로, 고을나(高乙那)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徒)로, 부을나(夫乙那)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徒)라 하고,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고 또한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로 부유하고 번영하였다.[1]
동국통감(東國通鑑)은 성종 15년(1484) 간행되어 맏이를 양(良)이라 기록하고, 이후 효종 4년(1654)에 이원진(李元鎭) 목사(牧使)도 삼성혈조(三姓穴條)에 양고부(良高夫)라 썼으며, 숙종 29년(1703)에 이형상 목사(李衡祥牧使) 역시 삼성사상량문(三姓祠上樑門)에 양고부(良高夫)로 썼다. 이때 사우(祠宇)를 완성하고 삼신인(三神人)의 위패(位牌) 순위를 정할 때 삼성신인강생(三姓神人降生)의 사적 문헌과 국사를 널리 상고(詳考)한 끝에 양을나(良乙那)를 제1위에 모시고, 고을나(高乙那)를 제2위에, 부을나(夫乙那)를 제3위로 결정 후, 제문(祭文)을 지어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1]
王朝實錄(왕조실록 42~P.163)에 의하면 영조 5년(1771)에 고한준(高漢俊) 등이 주상(主上)께 주청(奏請)하는 상소문에도 양고부(良高夫)로 썼다. 또한 이병도(李丙燾)의 韓國史(한국사), 김태능(金泰能)의 濟州島史論攷(제주도사논고), 國史大事典(국사대사전)•한국사대사전, 현용준(玄容駿)의 濟州島神記(제주도신기)에도 양고부(良高夫)라 기록되어 있다.[1]
5. 분파
부언경의 증손 부삼로(夫三老)가 세종 때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형제 중 첫째 아들 부유렴(夫有廉)은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제주도를 지켰고,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역임한 그의 아들 부세영(夫世榮)의 아들 부각(夫恪), 부협(夫協), 부열(夫悅), 부신(夫愼), 부폭(夫幅), 부홍(夫弘) 6형제는 제주6파(濟州六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부삼로의 막내 아들 부유성(夫有成)은 육지로 건너가 경기도 연천에 세거하였다.
6. 주요 인물
7. 현대
2000년 조사에 따르면 제주 부씨는 9,440명, 2015년에는 10,222명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7. 1. 인구
연도 | 인구 |
---|---|
2000년 | 9,440명 |
2015년 | 10,222명 |
7. 2. 집성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상도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토평동[3]
7. 3. 항렬자
참조
[1]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20
[2]
뉴스
부을나(夫乙那)
http://encykorea.aks[...]
2022-04-21
[3]
웹사이트
부씨(夫氏) 본관(本貫) 제주(濟州)입니다.
http://www.findroot.[...]
2022-07-27
[4]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LST_094_551_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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